
내가 확인한 바로는 1811년 9월이었다. 역마차 한 대가 링컨셔 한복판에 있는 애즈워비 저택 문 앞에 멈춰 섰다. 유일한 승객인 어린 소년은 마차가 멎자마자 뛰어내렸고, 초인종을 울린 뒤 현관문이 열리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앤 여왕 시대에 지어진, 높고 네모반듯한 붉은 벽돌집이 서 있었다. 돌기둥이 받치는 현관은 1790년 무렵의 한층 순수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덧붙인 것이었다. 창문은 수가 많고 길쭉하면서 폭이 좁았으며, 작은 유리창들이 두툼한 흰색 나무 창틀에 끼워져 있었다.
정면 꼭대기에는 둥근 창이 뚫린 삼각 박공이 얹혀 있었다. 좌우에는 별채가 있었고, 열주가 떠받치는 독특한 유리 회랑이 별채와 본채를 이어 주었다. 별채들은 보아하니 마구간과 저택의 관리 업무용 공간으로 쓰이는 듯했다.
각 별채 꼭대기에는 금박 풍향계가 달린 장식용 소탑이 솟아 있었다.
저녁 햇살이 건물을 비추어 유리창마다 불이 타오르는 듯 빛났다. 저택 앞에는 참나무가 군데군데 선 평탄한 정원이 멀리 펼쳐져 있었고, 가장자리를 두른 전나무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이 드러났다. 정원 끝자락의 나무들에 파묻힌 교회 종탑에서는 금빛 수탉 풍향계만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 탑의 시계가 여섯 시를 알렸고,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밀려왔다. 현관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소년에게 이 모든 풍경은 기분 좋은 인상을 주었다. 다만 초가을 저녁에 어울리는 쓸쓸함이 조금 배어 있었다.
소년은 워릭셔에서 왔다. 반년쯤 전 그곳에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뒤, 나이 지긋한 사촌 애브니 씨가 선뜻 거두어 주겠다고 나선 덕분에 이제 애즈워비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애브니 씨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다소 엄격한 은둔자로 여겼다. 그런 이의 한결같이 조용한 집안에 어린 소년이 들어온다면 새로울 뿐 아니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변화가 생길 것 같았다. 사실 애브니 씨가 무엇을 연구하며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케임브리지의 그리스어 교수가 후기 이교도들의 종교적 믿음에 관해서는 애즈워비의 주인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서재에는 고대의 밀의와 오르페우스 시편, 미트라 숭배, 신플라톤주의 학파에 관해 당시 구할 수 있는 책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대리석을 깐 현관 홀에는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장면을 묘사한 훌륭한 군상이 서 있었다. 주인이 거금을 들여 레반트에서 들여온 조각이었다. 애브니 씨는 이 조각에 관한 해설을 《젠틀맨스 매거진》에 기고했고, 《크리티컬 뮤지엄》에는 로마 제국 후기 로마인들의 미신에 관한 탁월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요컨대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므로, 이웃들은 그가 고아가 된 사촌 스티븐 엘리엇의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몹시 놀랐다. 하물며 먼저 나서서 애즈워비 저택에 데려다 살게 하겠다고 했다니 더욱 놀랄 일이었다.
이웃들이 무엇을 예상했든, 키가 크고 마르고 엄격한 애브니 씨가 어린 사촌을 다정하게 맞아 주려 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기쁜 듯 두 손을 비비며 서재에서 달려 나왔다.
“잘 왔구나, 얘야. 그래, 잘 왔어. 나이가 몇이지?” 애브니 씨가 말했다.
“아니, 내 말은, 오느라 너무 지쳐서 저녁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겠지?”
“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 엘리엇이 대답했다.
“기특하구나.” 애브니 씨가 말했다.
“그래, 얘야, 나이가 몇이지?”
처음 만난 지 이 분도 안 되어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하다니,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 생일이 지나면 열두 살이에요.” 스티븐이 말했다.
“그래, 얘야, 생일이 언제지? 9월 11일이라고? 잘됐구나. 아주 잘됐어. 앞으로 거의 일 년이나 남았지? 나는, 하하! 이런 걸 내 책에 적어 두는 걸 좋아한단다.
열두 살이 되는 게 맞지? 확실해?”
“네, 확실해요.”
“그래, 그래! 파크스, 이 아이를 번치 부인 방으로 데려가서 차든 저녁이든 뭐든 좀 먹게 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점잖은 파크스 씨가 대답하고는 스티븐을 아래층으로 안내했다.
번치 부인은 스티븐이 애즈워비에서 여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부인 덕분에 스티븐은 제집에 온 듯 마음이 놓였다. 둘은 십오 분 만에 아주 친해졌고, 그 뒤로도 줄곧 사이좋게 지냈다.
번치 부인은 스티븐이 도착한 해로부터 약 쉰다섯 해 전에 이 근방에서 태어났으며, 저택에서 산 지도 이십 년이나 되었다. 그러니 이 집과 이 일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번치 부인이었다. 게다가 아는 것을 남에게 들려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험심과 호기심이 많은 스티븐에게는 저택과 정원에 관해 꼭 알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월계수 산책로 끝에 있는 신전은 누가 지었어요? 계단에 걸린 초상화 속에서 탁자에 앉아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있는 노인은 누구예요?”
번치 부인의 비상한 기억과 식견 덕분에 이런 의문을 비롯한 숱한 궁금증이 풀렸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부인의 설명을 듣고도 그다지 속 시원히 풀리지 않았다.
11월의 어느 저녁, 스티븐은 가정부인 번치 부인의 방에서 난롯가에 앉아 이곳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애브니 씨는 착한 분인가요? 천국에 가실까요?” 스티븐이 불쑥 물었다.
본래 그런 판결은 다른 법정의 몫이라 여겨지지만, 아이들은 어른이라면 이런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특유의 믿음을 품기 마련이었다.
“착한 분이냐고요? 아이고, 도련님도 참!” 번치 부인이 말했다.
“주인어른만큼 마음씨 고운 분은 본 적이 없어요! 칠 년 전에 길거리에서 데려오다시피 한 남자아이 얘기를 내가 안 했던가요? 내가 여기 온 지 이 년 됐을 때 데려오신 여자아이 얘기도요?”
“안 했어요. 번치 부인, 전부 다 얘기해 주세요. 지금 당장요!”
“글쎄요.” 번치 부인이 말했다.
“그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그리 많지 않네요. 하루는 주인어른께서 산책에서 돌아오며 데려오셔서는, 그때 가정부였던 엘리스 부인에게 부족함 없이 잘 돌봐 주라고 하셨어요. 가엾게도 혈육 하나 없는 아이였지요.
제 입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어요. 여기서 우리하고 한 삼 주쯤 살았을 거예요. 그러더니 집시 피라도 섞였던 건지 어쨌는지, 어느 날 아침 우리가 아무도 눈을 뜨기 전에 잠자리에서 나가 버렸어요.
그 뒤로는 흔적도 자취도 본 적이 없고요. 주인어른께서는 몹시 상심하셔서 연못이란 연못은 다 뒤지게 하셨지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집시들이 데려간 것 같아요.
아이가 사라진 날 밤에 집 둘레에서 한 시간이나 노랫소리가 났거든요. 파크스 씨도 그날 오후 내내 숲에서 그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장담했고요. 아이고, 참!
말도 별로 없고 여러모로 별난 아이였지만, 난 그 아이가 참 좋았어요. 얼마나 살갑게 집안일을 거들던지, 놀라울 정도였지요.”
“그럼 남자아이는요?” 스티븐이 물었다.
“아, 그 가엾은 아이!”
번치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외국 아이였어요. 제바니라고 하더군요. 어느 겨울날 손풍금 손잡이를 돌리며 저택 진입로를 이리저리 다니는데, 주인어른께서 곧바로 안으로 들이셨어요.
어디서 왔는지, 나이는 몇인지, 어떻게 먹고사는지, 친척들은 어디 있는지, 더없이 다정하게 이것저것 물으셨지요. 하지만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외국 사람들은 원래 좀 제멋대로인가 봐요.
그 여자아이처럼 어느 날 아침 훌쩍 떠나 버렸으니까요. 왜 떠났는지, 가서 뭘 했는지, 그 뒤로 일 년이나 우리끼리 궁금해했어요. 손풍금도 가져가지 않았거든요.
저기 선반에 그대로 있잖아요.”
그날 저녁 남은 시간 동안 스티븐은 번치 부인에게 꼬치꼬치 이것저것 캐묻고, 손풍금으로 가락을 켜 보려고 애썼다.
그날 밤 스티븐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침실이 있는 저택 맨 위층의 복도 끝에는 오래전부터 쓰지 않는 낡은 욕실이 있었다. 늘 잠겨 있었지만 문 위쪽 절반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한때 그곳에 걸려 있던 모슬린 커튼도 사라진 지 오래라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른쪽 벽에 붙박인 욕조는 안쪽에 납을 댄 것으로, 머리를 두는 쪽이 창문을 향해 있었다.
바로 그날 밤, 스티븐 엘리엇은 자신이 그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창문으로 달빛이 비쳐 들었고, 스티븐은 욕조 안에 누워 있는 형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븐이 보았다는 것을 묘사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더블린의 유명한 성 미칸 교회 지하 묘실에서 직접 보았던 것이 떠오른다. 그곳에는 시신이 수백 년 동안 썩지 않고 보존되는 끔찍한 특성이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여위고 애처로운 형체였다.
먼지 낀 납빛 몸을 수의 같은 옷으로 감싸고 있었고, 얇은 입술은 비틀려 희미하고도 섬뜩한 미소를 띠었다. 두 손은 심장이 있는 곳을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
스티븐이 바라보고 있자, 그 입술 사이에서 멀리서 들리는 듯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 같더니 두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질겁한 스티븐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정신이 들자 자신이 정말로 환한 달빛 아래 복도의 차가운 널빤지 바닥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티븐은 그 나이의 소년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법한 용기를 내어 욕실 문으로 다가갔다. 꿈에서 본 형체가 정말로 그 안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스티븐은 잠자리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이야기를 들은 번치 부인은 몹시 놀라더니 욕실 유리문에 모슬린 커튼을 다시 달기까지 했다. 아침 식사 때 스티븐에게 그 일을 전해 들은 애브니 씨도 대단한 관심을 보이며 자신이 ‘내 책’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 내용을 적어 두었다.
춘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브니 씨는 어린 친척에게 그 사실을 자주 일러 주었다. 덧붙여 고대인들은 언제나 이 무렵을 어린 사람들에게 위태로운 시기로 여겼으니 스티븐도 몸조심하고 밤에는 침실 창문을 닫아 두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또 켄소리누스가 이 문제에 관해 남긴 말 가운데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 있다고도 했다. 이 무렵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스티븐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첫 번째 사건은 유난히 불안하고 가위눌리는 듯한 밤을 보내고 난 뒤에 일어났다. 다만 그날 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딱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 이튿날 저녁, 번치 부인은 스티븐의 잠옷을 꿰매고 있었다.
“아이고, 스티븐 도련님!” 부인이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어쩌다가 잠옷을 이렇게 갈가리 찢어 놓으셨어요? 이것 좀 보세요. 도련님 뒤치다꺼리로 깁고 꿰매야 하는 가엾은 하인들을 이렇게 애먹이시다니요!”
실제로 잠옷에는 일부러 마구 훼손한 듯한 칼자국 같은 찢김과 긁힌 자국이 여럿 나 있었다. 솜씨 좋은 사람이 바느질을 해야만 제대로 기울 수 있을 터였다. 자국은 왼쪽 가슴에만 나 있었는데, 길이가 6인치쯤 되는 긴 틈들이 나란히 뻗어 있었고, 그중에는 리넨 천을 완전히 뚫지 않은 것도 있었다.
스티븐은 어쩌다 그런 자국이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날 밤에는 분명 없었다.
“그런데 번치 부인, 이건 제 침실 문 바깥쪽에 난 긁힌 자국이랑 똑같아요. 그 자국도 제가 낸 게 절대 아니에요.”
번치 부인은 입을 벌린 채 스티븐을 바라보다가 촛불을 움켜쥐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 뒤 부인이 내려왔다.
“참, 스티븐 도련님. 대체 어쩌다 거기에 그런 자국이 났는지 이상하기도 하네요. 고양이나 개가 긁기에는 너무 높은 곳이고, 쥐야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꼭 중국 사람 손톱으로 긁은 것 같더군요. 차 장사를 하시던 외삼촌이 우리 자매가 어렸을 때 그런 손톱 이야기를 해 주곤 하셨거든요. 도련님, 나라면 주인어른께는 아무 말씀도 안 드리겠어요.
그리고 잠자리에 드실 때는 꼭 문을 잠그세요.”
“늘 잠가요, 번치 부인. 기도를 마치자마자요.”
“그래요, 착하기도 하셔라. 기도는 늘 빼먹지 마세요. 그러면 아무도 도련님을 해치지 못해요.”
그 말을 하고 번치 부인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따금 생각에 잠기면서 찢어진 잠옷을 기웠다. 1812년 3월의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다음 날 저녁, 늘 그렇듯 스티븐과 번치 부인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 집사 파크스 씨가 불쑥 찾아들었다. 평소에는 식기실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스티븐이 있는 줄도 미처 보지 못한 데다, 몹시 당황해서 평소보다 말도 빨랐다.
“저녁에 포도주를 드시고 싶으면 주인어른이 직접 가져오시라지요.”
들어서자마자 하는 말이었다.
“번치 부인, 난 낮에만 가져오겠소. 그게 아니면 아예 못 하겠소. 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쥐들이거나 지하 저장고로 들어온 바람이겠지요.
하지만 나도 이제 젊지 않으니, 전처럼 참고 할 수는 없소.”
“글쎄요, 파크스 씨. 이 저택에 쥐가 얼마나 많은지는 잘 아시잖아요.”
“그야 나도 부인하지 않소, 번치 부인. 조선소 사람들한테 말하는 쥐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지요. 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믿은 적이 없소.
하지만 오늘 밤에는 체면 불고하고 맨 안쪽 포도주 보관실 문에 귀를 댔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도 거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거요.”
“아이고, 파크스 씨. 그런 엉뚱한 소리는 정말 못 들어 주겠네요! 포도주 저장고에서 쥐들이 말을 하다니요!”
“번치 부인, 당신과 말다툼할 생각은 없소. 다만 맨 안쪽 보관실에 가서 문에 귀를 대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 말이 맞는지 알 수 있다는 거요.”
“파크스 씨도 참,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이들이 들을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저기 계신 스티븐 도련님이 혼비백산하시겠어요.”
“뭐요! 스티븐 도련님이요?”
파크스는 그제야 소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티븐 도련님은 내가 번치 부인한테 농담하는 것쯤은 다 알아들으세요.”
실은 스티븐도 눈치가 충분히 빨라서 파크스 씨가 처음부터 농담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지만 마냥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집사는 포도주 저장고에서 겪은 일을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이제 이야기는 1812년 3월 24일에 이르렀다. 스티븐에게는 기이한 일들을 겪는 하루였다. 바람이 요란하게 불어 집 안과 정원 어디에나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스티븐은 저택 부지의 울타리 곁에 서서 공원을 바라보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이 바람을 타고 곁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저항할 수도 없이 정처 없이 떠밀려 가면서, 어떻게든 멈추려고, 자신들의 비행을 멎게 해 줄 무언가를 붙잡아 한때 자신들도 속해 있던 산 자들의 세상과 다시 닿으려고 헛되이 몸부림치는 듯했다. 그날 점심 식사 뒤 애브니 씨가 말했다.
“스티븐, 얘야, 오늘 밤 좀 늦기는 하지만 열한 시에 내 서재로 올 수 있겠니? 그때까지는 내가 바쁠 테고, 네 앞날과 관계된 것 중에 꼭 알아 두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을 보여 주고 싶구나. 이 일은 번치 부인에게도, 집 안의 다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방에는 평소 시간대로 들어가는 게 좋겠구나.”
일상에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스티븐은 열한 시까지 깨어 있을 기회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서재 문 안을 들여다보니, 늘 방구석에 놓여 있던 화로가 벽난로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금을 입힌 오래된 은잔에 붉은 포도주가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글을 적은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스티븐이 지나갈 때 애브니 씨는 둥근 은제 상자에서 향을 꺼내 화로에 뿌리고 있었으나, 소년의 발소리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바람이 잦아들고 보름달이 뜬 고요한 밤이 되었다. 열 시쯤 스티븐은 침실의 열린 창가에 서서 바깥 들판을 내다보고 있었다. 밤은 고요했지만, 저 멀리 달빛 어린 숲에 깃든 정체 모를 무리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이따금 호수 건너편에서 길을 잃고 절망에 빠진 방랑자들이 내는 듯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올빼미나 물새의 울음소리일 수도 있었지만, 어느 쪽과도 꼭 닮지는 않았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호수 이쪽 기슭에서 들려왔고, 잠시 뒤에는 관목 숲 사이를 떠도는 듯했다. 그러다 소리가 그쳤다. 스티븐이 창문을 닫고 읽던 『로빈슨 크루소』를 마저 읽을까 생각하던 바로 그때, 저택의 정원 쪽 벽을 따라 난 자갈 테라스에 서 있는 두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소년과 소녀처럼 보이는 두 형체는 나란히 서서 창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 어딘가가 꿈속에서 보았던 욕조 안의 형체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했다. 소년의 모습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소녀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심장 위에 두 손을 포개고 꼼짝없이 서 있었다. 반면 검은 머리에 누더기를 걸친 야윈 소년은 두 팔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는 위협과 함께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굶주림과 갈망이 어려 있었다.
거의 투명한 두 손 위로 달빛이 비쳤고, 스티븐은 끔찍하리만큼 긴 손톱 사이로 빛이 투과하는 것을 보았다. 소년이 그렇게 두 팔을 들고 서자 무시무시한 광경이 드러났다. 왼쪽 가슴에 검은 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내 애즈워비의 숲 위로 울려 퍼지던 굶주리고 처량한 울음소리 가운데 하나가, 귀보다는 머릿속으로 곧장 전해져 오는 듯했다. 다음 순간 그 섬뜩한 두 형체는 마른 자갈 위를 소리도 없이 재빨리 지나갔고, 더는 보이지 않았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무서웠지만, 스티븐은 촛불을 들고 애브니 씨의 서재로 내려가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 겸 도서실은 현관 홀 한쪽으로 문이 나 있었고, 공포에 떠밀린 스티븐은 금세 그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평소처럼 문 바깥쪽에 열쇠가 꽂혀 있었으므로 잠기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애브니 씨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비명을 지르려는 것일까? 어째서 그 비명이 목구멍에서 막히는 것일까?
애브니 씨도 그 정체 모를 아이들을 본 것일까? 그러나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스티븐이 정신없이 밀어 대자 문이 열렸다.
애브니 씨의 서재 탁자 위에서는 몇 장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스티븐 엘리엇은 그 내용을 이해할 나이가 된 뒤에야 그 문서들을 통해 당시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았다.
“고대인들은 어떤 절차를 행하면 인간의 영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깨우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는 널리 퍼진 믿음이었다. 그 절차가 우리 현대인의 눈에는 다소 야만적으로 보이기는 한다. 나는 이러한 일에 관한 고대인들의 지혜를 직접 경험했기에 그들의 주장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일정한 수의 다른 인간에게서 인격을 흡수하면, 우리 우주의 근원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영적 존재의 무리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시몬 마구스는 한 소년의 영혼을 이용해 공중을 날거나, 모습을 감추거나, 원하는 어떤 형상으로든 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클레멘스의 『재인식』 저자가 쓴 중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그 소년을 ‘살해’했다.
또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의 저술에는 스물한 살 미만인 인간 세 명 이상의 심장을 흡수하면 이와 비슷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 상당히 자세하게 적혀 있다. 나는 지난 이십 년의 대부분을 이 방법이 사실인지 검증하는 데 바쳤다.
사회에 눈에 띄는 공백을 남기지 않고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이들을 골라, 내 실험에 쓸 하찮은 실험체로 삼았다. 첫 단계는 1792년 3월 24일, 집시 혈통의 소녀 피비 스탠리라는 아이를 제거함으로써 완수했다. 두 번째 단계는 1805년 3월 23일 밤, 조반니 파올리라는 떠돌이 이탈리아 소년을 제거함으로써 완수했다.
마지막 ‘희생자’는 내 사촌 스티븐 엘리엇이어야 한다. 희생자라는 말은 내 심정으로는 더없이 불쾌하지만, 굳이 그 말을 쓰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 아이의 날은 이번 1812년 3월 24일이어야 한다.
“필요한 흡수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은 살아 있는 실험체에게서 심장을 꺼내 태워 재로 만든 다음, 붉은 포도주 약 1파인트에 섞는 것이다. 포도주는 포트와인이면 더욱 좋다. 적어도 처음 두 실험체의 유해는 감춰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쓰지 않는 욕실이나 포도주 저장고가 그런 용도로 편리할 것이다. 실험체의 영적인 부분, 세간에서 유령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 때문에 다소 성가신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적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사실 이 실험은 오직 그런 사람에게만 적합한데, 이 존재들이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벌이는 미약한 시도를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실험이 성공할 경우 내게 주어질, 더욱 확장되고 해방된 삶을 생각하며 더없는 만족을 느낀다.
그 삶은 나를 이른바 인간의 정의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놓아줄 뿐 아니라, 죽음 자체의 가능성마저 상당 부분 없애 줄 것이다.”
애브니 씨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힌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얼굴에는 분노와 공포,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표정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왼쪽 옆구리에는 살이 끔찍하게 찢겨 심장이 드러나 있었다.
양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고, 탁자 위에 놓인 긴 칼도 말끔했다. 사나운 들고양이라면 그런 상처를 입혔을 법했다. 서재의 창문은 열려 있었고, 검시관은 애브니 씨가 어떤 야생동물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스티븐 엘리엇은 내가 인용한 문서들을 면밀히 읽고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원작: M. R. James · Ghost Stories of an Antiquary (1904)
고전 괴담·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이야기입니다. 원문 읽기
